Something to remember

97년이었나.

96년이었던 것 같다.

제능 오빠를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한창 유행하던 PC 통신에 빠져서 살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름 인기 있던 청소년 드라마의 주인공인 최강희의 팬클럽 'NEAT'의 대화방에서 오빠를 만났다.

매일 밤 열려있던 대화방에는 언제 접속해도 누군가가 반가운 인사를 해주었고,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고1이던 내게 '채팅'은 생활의 큰 기쁨이자 활력소였다. 


그곳에서 마음 맞은 멤버들 몇몇이 따로 친목 모임을 만들었고,

모임의 이름은 분류코드 sg114, 인연만들기(통칭 인연동)였다.

인연동의 시삽이 제능오빠였다.

오빠는 나와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만 꼰대질 한 번 하지 않고, 늘 편하게 대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남 나쁜 말도 하는 걸 못 봤고, 적절한 유머로 사람들을 웃게 해줄 줄 알았다.

이해심도 풍부해서, 고딩 때부터 대딩 때까지 꾸준히 질풍노도였던 나를 잘 도닥여주었다.


하루는 내가 당시 좋아하던 사람 때문에 힘들어서 대화방에서 하소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내 감정에 취해서 징징 짜고 있었는데, 오빠가 물었다.

'너 우니?'

대체 이 오빠는 파란 화면에 찍힌 하얀 글씨의 어디를 보고 그걸 안걸까?

내게 놀랄 틈도 오래 주지 않고 전화가 왔다. 오빠였다.

오빠 목소리를 듣자마자 뭔지 모를 안도감에 나는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내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오빠, 큰 형 같던 사람.

인연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던 그 사람.


그런 오빠가 지난 월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6월 9일 일요일. 밤.

오빠는 신장 이식 수술을 받으러 입원한다는 말을 카톡 단체방에 남겼다.

한 달 후쯤 퇴원하면 연락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때, 오빠 목소리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던 건,

내 나름의 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빠는 예의 그 따뜻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하도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면목없어하는 나에게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고 농담을 했다.

퇴원하면 정모 한 번 합시다-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웃으며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이때 들은 목소리가 마지막이 되었다.



어제, 즉 7월 11일 목요일 밤 11시 반쯤.

자다가 기범오빠의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화면에 뜬 오빠의 이름을 보는 순간, 싸한 느낌이 왔다.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다.

그런데 7월 8일 월요일, 아침을 먹고 난 후

갑작스러운 폐렴 증상을 보여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고...


그리고, 큰누나 되시는 분이 이제야 휴대폰 잠김을 풀었다며 연락을 준 어제는

원래대로라면, 제능 오빠의 퇴원 예정일이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신은 없다.

있다면 착한 제능오빠에게 이럴 리 없지.

몇 년을 고생하다, 이제 겨우 이식 수술도 잘 받았는데,

신이란게 있다면 이러면 안 되지.


오빠.

결국 이렇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졌네.

담에 만나서 이번에 못한 정모 꼭 하자. 그때까지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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